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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편. 최충의 구재학당 (사립교육, 실천학습, 제도설계)

고려 시대 문신 최충은 문하시중까지 오른 뒤 벼슬을 내려놓고 구재학당을 열었습니다. 984년 태어나 1068년 사망할 때까지, 『칠대실록』 편찬과 율령 정리를 주도했던 관료가 말년에는 송악산 아래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 흐름을 읽으며 “권력이 아니라 지속되는 시스템을 남기려 했구나” 싶었습니다. 배움을 소비가 아니라 작동하는 제도로 만들려던 그 집념이, 제가 겪었던 혼란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충 고려 유학자 12세기 구제학당 강학 장면
AI이미지 생성_최충 고려 유학자 12세기 구제학당 강학 장면

 

정보 소비와 사립교육의 차이

강의와 책은 계속 쌓이는데 제 삶은 잘 안 바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실력이라고 착각했던 거죠. 최충의 구재학당을 떠올린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학당은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는 곳이 아니라, 배움이 현장에서 굴러가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충은 문하시랑평장사, 도병마사를 거쳐 문하시중까지 역임한 인물입니다.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서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역사를 정리했고, 문종 즉위 후에는 율령을 정비하고 서북 변경 방어책까지 건의했습니다. 행정 능력이 뛰어난 관료였던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선택한 건 학당 운영이었습니다. 권력을 붙잡는 대신 교육으로 나라의 내구도를 올리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육이 “소비”가 아니라 “제도”로 작동해야 한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정보를 쌓기만 하면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얼마나 허술한지 깨달았던 거죠.

실천학습이 변화를 만드는 방식

그래서 매주 한 번, 지인 2~3명과 40분짜리 작은 학당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한 주에 배운 것 중 “현장에서 쓰이는 한 문장”만 가져오고, 10분 설명 뒤 20분은 서로 질문만 던졌습니다. 마지막 10분에는 다음 주까지 적용할 ‘한 가지 행동’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놀랍게도 혼자 공부할 때보다 덜 똑똑해 보이는데도 변화는 더 빨랐습니다. 사람 앞에서 말해야 하니 허세가 줄었고, 질문을 받으니 구멍이 드러났고, 행동을 정하니 미뤄지지 않았습니다. 지식이 늘어난 게 아니라 배움이 생활 속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최충의 구재학당 역시 비슷한 원리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의관자제 중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문하에서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건 단순히 명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학당이 시험 합격이라는 구체적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렸을 거라고 봅니다.

제도설계가 남긴 그림자

다만 마음이 편치 않은 대목도 있습니다. 구재학당이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로 칭송받는 만큼, 그 문이 누구에게 얼마나 열려 있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의관자제 중에서”라는 서술은 배움이 특정 계층과 시험 경로에 더 강하게 결박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과거 대비와 유학적 인격 도야를 함께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실에서 성취의 기준은 결국 합격과 관직으로 수렴되지 않았을까요. 교육이 제도로 자리 잡는 순간, 그 제도는 누군가에게는 문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벽이 된다는 사실을 최충도 알고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저 역시 작은 학당을 운영하며 비슷한 고민에 부딪혔습니다.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었고, 특정 업종이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배움의 확장을 목표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가 더 단단해지는 효과가 컸던 거죠.

왜 해동공자로 불렸을까

그럼에도 최충을 존중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전장에서 승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글과 제도와 교육으로 나라의 뼈대를 올리려 했던 고집 때문입니다. 서북 주·진의 공역 금지를 청하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했던 관료가, 말년에는 학당을 열어 인재를 길렀다는 흐름은 일관된 철학의 연장선처럼 보입니다.

‘해동공자’라는 별명이 단순히 학문이 뛰어나서만 붙은 건 아닐 겁니다. 교육을 통해 국가의 대계를 세우려 했다는 점, 그 시도가 구재학당이라는 실제 제도로 구현되었다는 점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제가 작은 학당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배움이 지속되려면 사람 사이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걸, 최충이 천 년 전에 이미 보여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게 정보 소비와 실천학습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충의 선택은 권력보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남기려 한 시도였습니다. 구재학당의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교육을 제도로 설계하려 했던 그 집념만큼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느낍니다. 배움을 어떻게 굴러가게 만들 것인가—이 질문 앞에서 저는 여전히 최충의 말년을 떠올립니다.

 

[함께 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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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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