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말, 동부 만주 지역에는 고구려 멸망 이후 거대한 힘의 공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대조영이 이끄는 집단은 오랜 억류 생활과 이동 과정의 시련 속에서 강력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 발해를 건국하게 됩니다. 당시 신라 말의 혼란과 비교하면, 발해의 건국 과정은 지역 세력의 통합과 제도 정비라는 측면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발해 건국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 유민과 대조영의 세력 확장
대조영 휘하의 집단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에 의한 오랜 억류 생활과 계속된 이동 과정에서 겪은 시련을 통해, 오히려 강력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고난이 집단의 응집력을 강화시킨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대조영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이러한 강력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급속히 동부 만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습니다.
당시 동부 만주 지역의 정치적 상황은 발해 건국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 별다른 유력한 토착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제적으로는 일종의 힘의 공백 지대였습니다.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으나, 이들을 통합할 구심점이 부재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때 새로운 힘의 구심점으로 대조영 집단이 등장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자발적으로 귀속해 들어왔습니다.
이 과정은 최치원이 고민했던 신라 말의 상황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신라 말기의 문제는 도덕의 쇠퇴가 아니라 권력의 분산과 통치 불능이었습니다. 최치원은 이 문제를 제도의 언어로 진단했으나, 그의 해법은 왕권 중심의 복원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반면 대조영은 지역 세력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냄으로써,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무너진 중심을 다시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중심을 창출한 것이었습니다.
| 구분 | 발해 건국기 | 신라 말기 |
|---|---|---|
| 정치 상황 | 힘의 공백 지대 | 권력 분산과 통치 불능 |
| 지역 세력 | 구심점 부재, 통합 가능 | 이미 강력해진 호족 세력 |
| 해결 방향 | 새로운 중심 창출 | 기존 왕권 복원 시도 |
| 결과 | 성공적 국가 건설 | 시대 역행적 처방 |
말갈족과의 통합과 국가 형성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고구려 유민뿐만 아니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대조영의 세력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갈족은 고구려 시대부터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토착 부족들로, 고구려와는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조영 집단에 자발적으로 귀속한 것은 단순한 정복이 아닌, 상호 필요에 의한 통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대조영은 이러한 다민족 구성의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오랜 억류 생활과 이동 과정에서 형성된 강력한 결속력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는 공동의 시련과 목표가 어떻게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치원의 신라 개혁론과 비교하면, 발해의 건국 방식이 갖는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최치원은 지방의 현실을 새로운 질서로 설계하기보다, 무너진 중심을 다시 세우는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이 선택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이었을지 몰라도, 이미 커진 지역 세력의 힘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던 처방이었을 수 있습니다. 반면 대조영은 지역에 산재한 세력들을 새로운 틀로 통합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지역 세력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중앙의 구심력을 유지하는 균형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 것은, 강압이 아닌 실질적인 이익과 안정에 대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도적 정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역 세력의 문제를, 새로운 정치적 구조를 통해 해결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외교와 발해의 국제적 위상
발해는 건국 후 곧이어 주변국들과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먼저 당나라와 대결하고 있던 몽고고원의 돌궐(突厥)과 국교를 맺었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당나라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돌궐과 연대한 것은, 발해가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라와도 통교했으며,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습니다.
713년 당나라는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는데, 그 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당나라가 발해를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발해의 책봉 수락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 내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현실적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당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돌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도 독자적인 외교를 펼친 것은 발해의 외교적 역량을 잘 보여줍니다.
발해의 이러한 다면적 외교는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동부 만주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당나라, 돌궐, 신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미묘한 자리였습니다. 발해는 이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는 내부 통합만큼이나 외교적 안정이 신생 국가의 성공에 중요했음을 시사합니다.
최치원의 신라 개혁론이 내부 제도 정비에 집중했다면, 발해의 건국 과정은 내부 통합과 외부 관계를 동시에 고려한 종합적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신라 말기의 위기가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구조와 지역 세력의 역학 관계 변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발해의 접근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새로운 정치 질서는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변화한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설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발해의 역사는 보여줍니다.
| 외교 대상 | 시기 | 외교 목적 |
|---|---|---|
| 돌궐(突厥) | 건국 직후 | 당나라 견제 및 전략적 연대 |
| 신라 | 건국 초기 | 한반도 관계 안정화 |
| 당나라 | 713년(중종 때) | 국제적 승인 및 책봉 체제 편입 |
발해의 건국은 혼란기 지역 세력을 새로운 중심으로 통합한 성공 사례입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라는 이질적 집단을 결속시키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자리를 확보한 대조영의 리더십은 주목할 만합니다. 최치원의 문제의식처럼, 권력의 분산과 통치 불능은 무너진 중심의 복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발해의 사례는 변화한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것이 진정한 해법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대조영은 어떻게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통합할 수 있었나요?
A. 대조영 집단은 오랜 억류 생활과 이동 과정에서 형성된 강력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힘의 공백 지대였던 동부 만주에서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별다른 유력 세력이 없었던 지역에 산재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안정과 보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귀속했으며, 대조영의 뛰어난 무예와 지략이 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Q. 발해라는 국호는 처음부터 사용되었나요?
A. 아닙니다. 발해라는 국호는 713년 당나라 중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다른 명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나라의 책봉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발해라는 국호가 확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Q. 발해의 외교 전략은 어떤 특징이 있었나요?
A. 발해는 건국 직후 돌궐(突厥), 신라, 당나라와 동시다발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다면 외교를 펼쳤습니다. 특히 당나라와 대결 중이던 돌궐과 먼저 국교를 맺어 당나라를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당나라와도 정식 통교하여 책봉을 받는 균형 외교를 구사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실리적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Q. 최치원의 신라 개혁론과 발해 건국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권력 분산과 통치 불능 문제를 왕권 중심의 복원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이미 커진 지역 세력의 힘을 되돌리기에는 시대 역행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반면 발해는 지역에 산재한 세력들을 새로운 중심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는 무너진 중심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 현실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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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조영